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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빛낸 사진가

로버트 카파(Robert Capa : 1913~1954)

by sajin 2024.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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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대표하는 종군기자로 매그넘의 설립자 중에 한 사람 이기도 하다. 스페인 내전부터 노르망디 상륙작전, 인도차이나 전쟁(월남전)등 20세기 현대사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쟁터의 최일선에서 활동한 사진가이다. 

로버트 카파는 1913년 헝가리 부다 페스트에서 태어났다. 1931년 좌익학생운동을 하였고 바이마르공화국의 베를린으로 망명하여 사진 에이전시 겸 통신사 데포트의 암실 보조원으로 취직한다. 1932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망명 중인 러시아 혁명가 레프 트로츠키의 연설장면을 촬영한 게 로버트 카파의 첫 사진으로 이사진이 사진 실력을 인정받게 된다. 히틀러의 나치당을 피해 프랑스 파리로 이주하고 그곳에서 자신의 첫사랑인 게르타 타로를 만난다. 그녀의 권유로 이름을 로버트 카파로 개명한다. (본명을 사용하니 헝가리인이라는 이유로 사진값을 제대로 쳐주지 않았다고 한다.)

 

1936년 연인인 게르타 타로와 스페인으로 가서 스페인 내전을 취재한다. 이곳에서 민병대원의 전사장면을 찍은 "어느 병사의 죽음"이란 사진이 종군기자로서 명성을 얻게 해 준다. 그러나 이사진은 지금까지도 조작 논란에 시달리게 한다. 사진 자체가 상당히 극단적인 상황이고 사진 어디에도 총에 맞은 흔적이 확실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로버트 카파의 생애를 볼 때 조작 같은 건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믿는 사람이 많다.

레프 트로츠키의 연설장면
로버트 카파를 유명하게 만든 "어느 병사의 죽음"

스페인 내전에서 로버트 카파가 잠시 파리로 간사이 후퇴하는 공화국군의 전차에 깔여 연인인 게르타 타로는 죽고 만다. 
1938년 중화민국 총통인 장제스의 선전영화 "4억의 민중" 촬영을 의뢰받고 중국에 가서 중일전쟁의 모습을 취재한다. 독일군의 프랑스 침공으로 미국으로 이주한 후 북아프리카 전선을 시작으로 모든 전쟁터에서 로버트 카파를 볼 수 있게 된다. 

그를 다시 한번 유명하게 만든 노르망디 상륙작전 사진은 오마하 해변에 상륙하는 부대와 함께 움직이며 사진을 담았다. 전쟁이 끝난 후 1946년 미국 시민권을 받았고 그 후에 모스크바와 키예프등 당시 전쟁의 상흔이 남았던 소련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1947년 몇 명의 사진가와 매그넘 을 설립 했으며 1951년에는 회장에 선임된다.

 

1954년 라이프의 의뢰를 받고 월남전을 취재하던 중 5월 25일 프랑스군의 행군을 취재하다 지뢰를 밟아 사망하게 된다.

 

로버트 카파의 동생인 코넬 카파(보도사진가)는 자신의 형인 로버트 카파가 촬영한 사진을 보관할 목적으로 국제사진센터(International Center of Photography)를 설립한다. 또한 그의 정신을 기려 투철한 기자 정신의 대명사가 되는 '카파이즘'이 생겼다.

 

그는 전쟁 이외의 르포르타즈나 포오트레이트에서도 비범한 재능을 발휘한다. 대전 후에는 미국의 거장 소설가 존 스타인백과 함께 소련을 여행하면서 미지의 현실을 다큐멘트 한다. 그는 1949년과 51년에 피카소의 가정생활을 기록하였는데 이 작품도 그의 대표작에 속한다. 그의 사진은 빈틈없는 전통적인 보도사진이다. 카파는 전쟁이든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그의 본질을 냉정하게 파헤친다. 비정하다 할 정도로 그는 사람이나 사회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하는데 철저했다. 전쟁의 비참한 현실을 강조 표현하여 전쟁의 방지를 호소한 카파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휴머니스트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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